폭설이었다 그다음은
한연희 지음아침달
( 출판일 : 1970-01-01 )
작성자 :
양○영
작성일 : 2026-09-13
페이지수 : 120
상태 : 승인
들어보지 못한 젊은 시인의 시집을 골라보았다. 일견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무질서한 시어들의 나열을 보며 반갑다는 마음이 앞선다. 한연희의 시는 언어가 그동안 맺던 관계를 거부하고 있었다. 새롭게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신의 방식대로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고 있었다. 시인이 시 속에서 구현하는 무질서는 자유를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질서를 향한 의지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맺을 수 없는 관계들을 엮고 싫은 걸 싫다하며 하고싶은 말을 쏟아낸다. 그 생경한 언어들의 맺음과 때로 단호하게 느껴지는 거부는 불쾌하지 않다. 제 세상에 대한 구축만을 염원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다르더라도 받아들여지고싶은 마음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정해진 틀이 있는 세상에 대한 비난보다는 어지럽고 다른 질서로 움직이는 세상을 그려보임으로써 세상을 확장시키고싶은 것이 아닐까하는 마음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과거의 것을 새롭게 쓰고 이질적인 이미지를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절연이 아닌 통합을 노래하는 마음이 예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녀는 희망을 노래하지는 않는다. 제목인 '폭설이었다 그다음은'는 "유령환각"이라는 시의 첫 시작 부분이다. 저 '그다음은' 뒤에 이어지는 시어는 '대학살'이다. 그 시에 담긴 슬픈 정서는 독재며 전쟁 등 가학으로 빚어지는 끝없는 고통을 상상하게 한다. 세상은 모습이 이러하며 엎친 데 덮치는 일은 반복될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냉소는 아니지만 희망으로 읽히지 않는 이 적나라함은 체념도 아니다. 그녀는 슬퍼하는 마음에, 그 슬픔을 위로하는 마음에, 종내는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을 허용하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는 것 같다. 되든 안되든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한연희의 시가 허무를 내포하지 않아서 좋다. 그녀는 세상의 변화를 꿈꾸고 그것을 가감없이 드러내지만 되지 않을 것이란 섣부른 체념도 꼭 이루어질 것이란 망상도 품지 않는다. 어딘가에 다다르길 꿈꾸지 않는 시는 제 몫을 해내며 그저 걷고 있다. 그 묵묵하게 느껴지는 발걸음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