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의 계보
프리디리히 니체 지음; 박찬국 옮김아카넷
( 출판일 : 2021-06-30 )
작성자 :
양○영
작성일 : 2026-07-14
페이지수 : 342
상태 : 승인
이 책을 지금 읽게 된 것이 다행이다. 만약 10여 년 전에 읽었다면 '무시무시한' 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만큼 <도덕의 계보>에 나타난 니체의 생각은 그야말로 '전복적'이다. 지금도 이렇게 당황스러운데 당시 철학자들은 신랄하면서도 지극히 편파적이지만 반박하기 어려운 이 이야기를 어떻게 평가했을지 궁금하다. 나의 관점이 자유로운 만큼 어떤 사람의 유명세에 이끌리지 않고 단지 그의 관점이라고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금' 읽었기에 이해도 평가도 가능한 듯하다.
얼마 전에 먼저 읽은 <선악의 저편>보다 더 직설적이다. 역자는 미리부터 자신은 다른 역자들과 달리 니체의 명확한 어조를 살려 번역했음을 밝힌다. 아니 이 어조를 다른 역자들은 어떻게 직설적이지 않게 번역할 수 있는 걸까. 사실 읽으면서 이런 반골적인 이야기를 좀 부드럽게 돌려 말하면 듣는 사람도 편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니체가 격노하는 이유가 이런 솔직하지 않음이으니 이런 강한 어조를 구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니체에게 도덕은 전에도 썼듯 노예의 도덕이다. 도덕은 약자들이 강자들에게 연민과 보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설계된 것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도덕의 계보>에서는 사회와 형벌 제도가 '양심'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 양심이나 죄책감을 니체는 강자들에 대항할 수 없었던 약자들의 자기 공격이라 말한다. 기독교의 천국을 강자들에 대한 약자들의 원한이 만들어낸 이상이라 설명한다.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는 금욕주의자들의 '무'는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음을 욕구하는 것이라고 일갈한다.
이야기들이 좀 어마어마해 바로바로 납득이나 수긍을 하며 읽을 수가 없지만 다 읽고 나면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자신에게 솔직하고 충실하라는 것이다. 겁이 나 억지로 제 욕구를 누르면서 착하다는 핑계대지 말라는 것이다. 매력적인 조언인자 제안인데 계속해서 극단적인 표현들로 이야기하니 몸둘 바를 모르겠다. 사실 지금 심리학의 주류인 '마음이론'이 다하고 있는 말이다. 현재는 우울증을 일종의 자기 공격이라고 보기도 하니 니체의 말은 상당히 현대적인 이야기인 셈이다. 아니 니체 이전부터 이런 이야기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되고 있긴 했다. 그래도 현대 심리학이 지금 여기, 충만 등과 같이 마음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부드러운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니체는 또 착한 척하고 있다고 뭐라고 할 것만 같다.
니체의 주장 중 '무'를 향한 의지를 삶에 대한 경멸이라 말하는 것은 수긍하기가 쉽지 않다. 니체처럼 자신에게 솔직하며 나아가라고 끝없이 독력하는 사람이 놓치는 것이 삶에 존재하는 공허일 수도 있다. 수학에 0이 없다면 대혼란이 오듯 삶에는 니체가 추구하는 '힘에의 의지'뿐아니라 '무에의 의지'도 존재한다고 본다. 무를 받아들이지 못해 니체가 저토록 격노하는 어조로 달리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도덕의 계보>에서 발견한 것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지난 전시 '데이미언 허스트전'의 주제이다. 관심이 있던 작가이기에 다녀왔는데 주제가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였다. 미술관은 전시 종료 2주 전에 진짜라고 했던 '소머리'를 가짜라고 밝혔다. 물론 작가와 미리 계획한 전시의 일부였다. 이 진실 밝히기 퍼포먼스는 전시 주제와 맞물려 데미미언 허스트의 작품 세계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 말이 번역은 조금 달랐지만 <도덕의 계보>에 있었다. 이 책에는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고 번역되었다. 니체는 이 말을 철학자들이 진리를 쫓는 금욕주의자들의 이상을 반대하지만 결국 똑같이 진리를 향한 무조건적인 의지를 드러낸다고 주장하기 위해 사용한다. 사실 니체의 말을 인용하는 것인 줄 몰랐을 때는 데이미언 허스트가 저 말을 통해 결국 자신의 말과 작품이 진리라는 역설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작가가 니체의 방식으로 우리가 믿는 것이 얼마나 허상일 수 있는지 예술을 통해 전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니체가 저 말을 사용한 의미는 그 말을 쓰는 사람들 역시 진리에 대한 의지를 드러낸다는는 것이다. 데이미언 허스트를 니체 식으로 해석한다면 그 역시 진리에 대한 의지, 좀더 나아간다면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자신이 진리는 오만에 빠져 있는 것이다. 작가의 생각을 작품을 통해 해석할 수밖에 없지만 역설과 반어가 실상 숨은 욕망을 왜곡해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이 생각을 다른 텍스트를 읽을 때 여러 번 적용하고 검토해봐야겠다. 아무래도 니체식 전복에 물들어 버린 것 같다.
니체는 스토아학파와 기독교를 연상시키는 '금욕주의적 성직자'를 병든 의사나 간호사라 부르며 병든 무리를 위해 존재한다고까지 말한다. 이들에게 의존하지 말고 본능대로 결국 '지 맘대로 살라'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살라는 것이 아니다. 가식이나 위선없이 제 자신에게 솔직하기를, 제도나 관념과 굴종하며 주저하지 말라는 말로 변형될 수도 있는 말이다. 니체가 파악하는 '도덕의 계보'는 약자의 억눌린 울분이 자기 연민화된 역사이다. 논지 자체가 워낙에 전복적이니 어조가 강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렇다 해도, 니체는 정말 센 맛이다. 니체 아저씨, 알겠어요, 이제 그만 고정하시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