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송세월 : 김훈 산문
김훈 지음나남출판
( 출판일 : 2024-06-20 )
작성자 :
이○희
작성일 : 2024-09-18
페이지수 : 332
상태 : 승인
*제목: 김훈 작가라는 스타일
그의 몽당 연필은 아직 심이 죽지 않았다. 다만 조금 무뎌졌을 뿐.
핸드폰에 부고가 찍히면 죽음은 배달상품처럼 눈 앞에 와있다. 액정화면 속에서 죽음은 몇 줄의 정보로 변해있다. 무한 공간을 날아온 이 정보는 발신과 수신 사이에 시차가 없다. 액정화면 속에서 죽음은 사물화되어 있고 사물화된 만큼 허구로 느껴지지만 죽음은 확실히 배달되어 있고, 조위금을 기다린다는 은행계좌도 찍혀있다.(p.7)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저무는 저녁에 허균, 차천로, 김득신의 독서를 생각하는 일은 슬프다. 독서는 쉽고 세상을 헤쳐 나가기가 더 어렵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세상살이는 어렵고, 책과 세상과의 관계를 세워 나가기는 더욱 어려운데, 책과 세상이 이어지지 않을때 독서는 괴롭다.(p.157)
명품 핸드백이나 고가 자동차를 사고 파는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은 자유와 조화에 도달할 수 있겠지만, 4천원이나 5천원짜리 밥을 먹는 거리에서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몽둥이'이거나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다.(p.163)
나는 이 침묵이 가장 현명하고 거룩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안중근은 이 위태로운 신문에 침묵함으로써 현세의 교회와 화해할 수 있는 마지막 통로를 열어 놓았다. 이 통로를 따라서 빌렘은 여순감옥의 안중근에게 왔다.(p.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