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4, 정수: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윤태호 지음위즈덤하우스
( 출판일 : 2012-12-24 )
작성자 :
윤○석
작성일 : 2024-08-31
페이지수 : 293
상태 : 승인
미생에서 장그래는 일단 계약직으로 2년 간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2년 뒤에 재계약을 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몰라도 여하튼 2년 간은 정직원처럼 일을 할 수 있고 해야만 했다. 즉, 이제부터 배우는 인턴이 아닌 신입이지만 한 명의 몫을 해내야 하는 직원이란 소리다. 나 역시 제약 회사에서 일을 할 때 한 명의 몫을 해야만 하는 무게감을 확실하게 느꼈다. 그 이후나 지금이라고 그 무게감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사실 거의 프리랜서에 가까운 일을 하고 있어 그 무게감이 덜 한 건 어쩔 수 없다.
여하튼 제약 회사에서 일을 할 당시에 신입 교육을 받을 때와 각 지역 사무실에 배치되 OJT를 받는 순간 까지는 솔직히 한 명의 몫을 할 수도 없었고 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신입 교육과 OJT를 받을 때도 월급은 받았다. 80% 정도던가? 정확하진 않지만 받긴 받았다. 정직원이 돼서 일을 열심히 잘 하라는 회사의 투자이기도 하다.
회사의 그런 투자의 시기가 지나고 100%의 급여를 받는 순간부터 한 명의 몫이라는 무게감은 정말 남다르게 가슴 깊은 곳으로 들어 왔다. 들어 온 정도가 아니라 가슴을 후벼 팠다. 내가 제약 회사에서 한 일은 병의원과 약국에 회사의 약을 파는 영업이었다. 그런데 일반적인 영업과는 조금 달랐다. 여기서 말하는 일반적인 영업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자동차나 보험 영업을 말한다.
정확하진 않지만 자동차나 보험 영업은 고정 급여라는 게 없다. 즉, 차를 많이 팔고 보험 계약 체결을 많이 하면 할 수록 인센티브를 많이 받는 소위 능력제 급여 구조였다. 그런 곳은 일하는 사람을 일 열심히 하라고 시쳇말로 갈굴 필요가 없다. 자기가 열심히 해서 많이 팔면 그에 상응하게 돈을 많이 버는 거고 그렇지 못하면 역시 그에 맞게 돈을 적게 벌면 그만 인 구조기 때문이다. 이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영업이다.
하지만 제약 회사 영업은 기본 의미는 같지만 신기하게도 고정 급여가 있다. 고정 급여에 더해서 약을 많이 팔면 인센티브를 얹어 주는 형태의 급여 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러니 고정 급여로 주는 만큼 약을 팔아 오지 못하면 회사 입장에선 가만히 둘 수 없는 구조였다. 마감 시기만 되면 사무실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할당된 일정 수준의 약을 팔지 못하면 퇴근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만큼은 약을 팔지 못하는 사원은 인간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개 돼지였다. 개나 소의 새끼를 찾는 욕을 들어 먹는 건 마감의 아주 지극히 평범하면서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영업을 잘 하면 문제가 될 게 전혀 없지만 난 영업엔 영 젬병이었다. 도무지 뭘 어떻게 팔 수가 없었다. 지금 기억에 의하면 내가 새롭게 판로를 구축해 팔아 본 약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든다. 기존에 선배들이 구축해 놓은 몇 곳을 인수인계 받아 늘 나오는 주문만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 한 명의 몫을 위해 오늘도 정말 많은 곳에서 고군분투할 이 세상의 모든 분들의 마음이 상하지 않고 건강하기를 기원하면서 글을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