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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장편소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문학동네 ( 출판일 : 2023-09-06 )
작성자 : 이○희 작성일 : 2024-06-02
페이지수 : 767 상태 : 승인
*제목: 나의 무라카미 하루키 최애작

20대 초반의 나에게 독서란 무엇인가 물었다면 그 답은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도서관 한 켠에서 <태엽 감는 새>나 <1Q84> 등을 진지하게 읽던 경험은 그 날들의 풍경까지 머릿속에 뚜렷이 생각나게 할 만큼의 깊은 경험들이었다. 20대 중후반이 되면서 하루키의 소설들을 '놓'았다. 취업 준비에 바빠서가 표면적인 큰 이유였지만 그보다는 사실 하루키의 소설들이 더 이상 나에게 울림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그 어느 때보다 현실에 발 붙이기를 갈급했던 당시의 나에게 뭔가 너무나 멀리 있는 이야기로 '느껴지는' 그의 이야기에 조금은 지쳤었나 싶다.

그러다가 (나에게나 작가에게나) 많은 세월이 지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만났'다. 만났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나에게 이 소설의 의미는 각별하다. 우선 다시금 하루키의 글들에게 완벽하게 감화한 경험을 했는데 그 안에 담긴 큰 울림 주는 인생과 삶에 관한 그의 철학 때문이다.

아니, 이 세계에 완전한 것이란 없어,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형체를 지닌 것이라면 무엇이든 반드시 약점이나 사각이 있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는다.
"이 벽은 누가 만들었나요?" 나는 물었다.
"아무도 만들지 않았어"라는 것이 문지기의 굳건한 견해였다. "처음부터 여기 있었지."(46p)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문지기는 말했다. "머리 위에 접시를 얹고 있을 땐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 편이 좋다는 거야." 그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잘 와닿지 않았다. 다만 철학적 성찰보다 실제적인 경고에 가까우리란 건 이해할 수 있었다.(90p)

나는 감탄해서 그림자를 보았다. "머리를 쓸 줄 아는구나."
"그거 알아요? 이 도시는 완전하지 않아요. 벽 역시 완전하지 않고요. 완전한 것 따위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아요. 어떤 것에나 반드시 약점이 있고, 이 도시의 약점 중 하나는 저 짐승들이에요. 그들은 아침저녁으로 출입시킴으로써 도시는 균형을 유지하죠. 우리는 방금 그 밸런스를 무너뜨린 겁니다."(204p)

흰 눈으로 둘러싸인 곳에 혼자 서서 머리 위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면 가끔 나도 알 수 없어졌다. 내가 지금 과연 어느 세계에 속해 있는지. 이곳은 높은 벽돌 벽의 안쪽일까, 아니면 바깥쪽일까.(426p)

본체와 그림자라는 것. 그 은유는 1800년대 샤미소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필두로 하여 역대 많은 문학 작품에 변주 되어왔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내가 가장 주목한 점도 그 그림자와 본체였다. 서로 간의 상호작용과 누가 진짜로써 세상에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대한 고찰이었다. 나 자신과 그림자는 영원히 뗄 수 없는 관계이자 그림자는 영원히 본체에 종속적 관계일 수 밖에 없다는 점, 그리고 연상 되지 않을 수 없는 가끔은 이 세상 속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내 모습에 대한 열패감. 그런 감정들이 내 지난 인생에 찐득하게 붙어있던 아웃사이더로서의 심정이었다. 그런데...

"본체와 그림자란 원래 표리일체입니다." 고야스 씨가 나지막히 말했다. "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 역할을 맞바꾸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역경을 뛰어넘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랍니다. 무언가를 흉내내는 일도, 무언가에 대해 척하는 일도 때로는 중요할지 모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니까요."(452p)

소설 속 가장 좋았던 인물인 고야스 씨가 주인공에게 위와 같이 말해줬을 때 나는 갑자기 마음 속 저 깊은 우물에 물이 차오르는 듯한 슬픈 감정이 느껴졌는데, 그 슬픔은 정말 깨끗한 깨달음의 감정이어서 나도 모르게 미소까지 함께 지어지게 하는 그런 슬픔이었다. 정말이지 놀랬다. 이 긴 서사 내내 나는 주인공의 본체와 그림자의 분리와 누가 우선하느냐의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있었건만. 하루키는 고야스 씨의 입을 통해 그 둘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둘 중 어느 것도 나머지 하나에 우선하지 않는다고 전언한다. 그 생각의 깊이가 오롯이 나의 생활에 전해져 이 '소설'을 읽고 난 후의 나는 무려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등을 곧게 펴고 세상을 대하게 되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또 다른 좋은 작품을 내놓는 작가. 역시 루틴의 힘인가. 작가의 삶처럼 꾸준하면서도 그 기민함을 놓지 않는 한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다. 갈피 넣고 메모 해 놓은 책의 부분들을 다시 한 번 꺼내 읽어보며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개인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최고 문제작이자 최고 작품이자 최애작으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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