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생활자의 수기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 이동현 옮김문예
( 출판일 : 2010-01-01 )
작성자 :
양○영
작성일 : 2025-06-28
페이지수 : 198
상태 : 승인
도스트옙스키의 소설은 무거웠다. 이 무거움이 어디에서 왔는지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보고 여실히 깨달았다. 왜 도스트옙스키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작품을 보라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작중 화자가 스스로 다스릴 수 없는, 외면할 수 없는 감정을 그만 파도 될 때까지 파고 있었다. 이전에 읽은 <죄와 벌>이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현학적인 말들이 가득하면서도 왜 그토록 비이성적으로 느껴졌는지, 왜 그토록 집요했는지 이 작품이 설명해주었다. '관통'이란 말이 주는 느낌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머리에 총알이 '팽'하고 직선으로 지나가는 듯한,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통찰이 찾아왔다.
이 소설은 2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는 40살의 화자가 자신이 지하에 사는 사람임을, 글을 쓰고 있음을, 어떤 사람인지를 객관적인 어조로 그린다. 2부에서는 24살에 있었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에피소드를 소상하게 서술한다. 당시 자신이 얼마나 혼란스런 감정에 빠져 있었는지를 드러내는 분노에 가득 찬, 그러나 역시나 '객관적인 어조'로 쓰고 있다.
1부와 2부의 나눔과 서술 어조는 화자를 이해하게 하는 단초가 된다. 서술에는 모두가 가진, 어쩌면 내가 며칠 내내 빠져 있었던 '양가 감정'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타인을 의식하지만, 그들이 자신을 대체로 부정적으로 느낀다는 것을 화자는 잘 안다. 거기에서 오는 자괴감과 열등감에서 오는 감정적 열패감을 그는 힘들어한다. 그 열등감을 우월감을 통해 보상받으려 하지만 자신이 이러한 시도를 한다는 것조차 받아들이지 못해 분노한다. 그는 자신을 못났다고 생각하면서도 특별하다는 우월감, 다른 이들을 깔보면서도 자신보다 그들이 낫다는 열등감 속에서 길을 잃는다. 그래서 그는 나가고 싶지만 지하에 있고, 지하에 있지만 나가고 싶다.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이반이 빠져있는 감정이다. 그래서 이들은 조용하지만 너무나 말이 많다. 말로는 온전히 설명되기 힘든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저 자신이 수용하거나 지나가게 두어야 한다. 작가는 화자를 통해 삶을 고통을 드러내지만, 우리는 그 고통이 때로는 자신이 판 함정임을 인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보여지는 '나'와 내가 보는 '나'의 거리감은 어쩌면 '나'에게 하는 거짓말의 무게이다.
화자는 '고결'한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이 못내 괴롭다.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것은 내가 원하는 만큼 나를 대우해주지 않는 세상일까, 스스로 자신을 보잘 것 없다 여기며 괴로워 하는 자신일까. 둘 모두일 것이다. 타인은 나를 초라하게 볼 수도 있고 나는 초라할 수도 있다.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길 수 있으나 초라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지하에 숨는다하여 나의 초라함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에서 위안을 얻을 뿐이다. 불필요하게 '나'를 정의해 스스로 만든 감옥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
어쩌면 모든 명명은 우리를 가둔다. 초라한들 초라하지 않는들 뭐가 문제란 말인가. 고결하고 싶다면 고결을 위해 애쓰면 될 일이다. 엊그제 <원더>를 읽으며 스스로에 부과했던 '위선'에 대한 짐이 비로소 내려진다. 부끄럽다면 그저, 멈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