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의 백합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 정예영 옮김을유문화사
( 출판일 : 2010-01-01 )
작성자 :
고○철
작성일 : 2025-06-03
페이지수 : 415
상태 : 승인
고리오 영감으로 발자크의 소설, 인간극을 처음 접했다. 아무리 떠올려 봐도 그때의 감상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만큼 고리오 영감이라는 소설은 나에게 큰 인상을 주지는 못했던것 가다. 그냥 구조적으로 잘 짜여진, 등장인물 각각의 캐릭터도 확실하며 시대상도 잘 반영된 고전소설, 또는 풍속소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어떤 책을 감명깊게 읽어도 그 감동이 작가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가끔 생기는 그 관심도 다른 저서에 대한 관심이 전부였다. 책을 읽으면서 너무나 아름다운 이야기다 라는 생각이 마지막으로 든게 언제였던가. 내 인생의 제대로된 첫 독서는 젊은 베르터의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감동을 뛰어넘는 이야기를 좀처럼 만날 수 없었다. 아름다운 배경 묘사와 더불어 펼쳐지는 격정적이며 차오르다 못해 폭발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골짜기의 백합을 읽으면서 나는 그때와 비슷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발자크의 인간극 중 풍속연구-시골 생활 전경에 속하는 이 이야기는 그 분류에 걸맞게 작품의 배경인 투렌과 앵드르강 유역의 풍경에 대한 묘사가 정말 대단한데, 발자크의 서정적 묘사들에 푹 젖어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니 내가 마치 작중 주인공인 펠릭스가 된 듯 풍경에 압도되는 듯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이 정도 경험이면 체험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듯 하다-
이야기는 주인공 펠릭스가 나탈리라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한다. 그리고 전개되는 내용은 자신의 어린시절과 첫 연인-모르소프 백작 부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펠릭스의 어린 시절은 발자크의 어린시절과 맞닿아 있는 듯 하다.-작가 본인은 부정했지만-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것 같았지만 형제의 후광에 밀려 항상 외면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특히, 어머니가 펠릭스를 대하는 냉소적인 태도는 펠릭스를 모성 결핍 상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요인들이 주인공의 어린시절 전반에 영향을 끼치며 이런저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점점 세계에서 고립되어 간다. 백작 부인에 대한 펠릭스의 사랑은 아름다운 여인을 쟁취하고자 하는 젊은 시절의 열정이었다.
주인공에게 백작부인은 단순히 연인이 아닌, 자신과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매개체이며 더 나아가 세계 그 자체이기도 하다. 사랑을 갈망하는 펠릭스에게 백작부인은 앙리에트라는 애칭을 부르는 것을 허락한다. 그리고 그애칭의 주인이었던 숙모의 몫 만큼만 자신을 사랑해달라 부탁한다. 정절을 지키고자 하는 백작부인은 펠릭스가 자신을 사랑의 대상이 아닌 운명을 같이하는 존재로 생각해 주기를 바랬다. 그리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마치 돈키호테의 둘시네아 같은 존재가 되었다.
펠릭스는 백작부인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그 누구와도 더는 사랑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겠다 결심한다. 하지만 백작부인을 기리는 듯한 이 이야기가 사랑하는 다른 여인에게 보내는 편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보자. 이 소설의 이런 독특한 구조도 이야기의 여운을 더하는 듯 하다.
독서를 마무리하는 긴 글을 마치면서 이들의 사랑이 스러져간 골짜기를 상상해본다. 그 아름다운 골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