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장편소설
에르난 디아스 지음 ; 강동혁 옮김문학동네
( 출판일 : 2023-02-24 )
작성자 :
동○영
작성일 : 2024-05-21
페이지수 : 488
상태 : 승인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좋아했는데 미국의 밤과 그림자를 잘 나타냈다고 생각해서였다. 특히 혼자 책을 읽는 모습이나 웃지 않는(표정이 없는) 여성이 인상적이었는데, 늘 모델은 부인이었다고 한다. 조세핀 호퍼 역시 화가였는데 사회와 남편의 압박에 납작해져 본인의 활동은 거의 하지 못했다. 남편은 폭력적이었다. 그런 남편의 모습은 그림에 나와 있지 않고 부인만 남았다. 현대인의 고독함과 개별성의 대표작으로 자주 꼽히지만 배경을 알고 나니 이제는 그의 그림들이 다르게 보인다.
이 책도 그렇다. 최대한 자세하게 있는 그대로 과거를 남기는 것을 원칙이라는 서양의 자서전과 평전을 부러워했었는데, 사실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다는 명제를 (소설임에도) 마주하기 불편하다. 특히 이것은 개츠비나 배빗, 베벨 같은 자본주의를 자신만의 이익을 남기는 데 악용하는 남자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포장하기 나름이겠지만 결론은 같다.
나는 무결점,
부인(여성)은 매우 간단하게.
너무나 졸작인 1부, 2부를 읽다가 (작가가 일부러 그렇게 쓴 이유가 있다) 그만두고 싶었는데 이게 소설이라는 게 생각나 순서를 건너뛰어 4부부터 읽었다. 물론 베벨의 부인이 뛰어났다는 걸 증명할 수는 없다. 펜과 마이크를 거의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자체로 존재했다. 그 사실을 아버지와 남자친구와 고용인 사이에서 어떻게든 꺾이지 않으려 했던 여성이 있었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누구의 삶도 간단하지 않다.
["간단하게 쓰게. 예술에 대한 밀드레드의 사랑을. 일반 독자도 접근할 만한 것으로 만들어야 해."
나는 이후 몇 주에 결쳐 비슷한 지시를 받곤 했다. 객관적 문단과 느낌을 죽인 문장이 늘어갈수록 내 배신감은 깊어져갔다.
"밀드레드의 사랑스러운 부드러움을 좀더 강조해서 전달해야 하네. '부드러움'과 '강조'가 모순적인 단어처럼 보일 수 있을 걸세. 하지만 정말이지, 바로 그 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네. 밀드레드의 연약한 천성에 말이야. 밀드레드의 취약함에. 친절함에."
"잘 알겠습니다. 부인의 그런 점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을까요?"
"아, 그건 나보다 자네가 휠씬 잘할 거야."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굳이 억누르지 않았다.
"뭐. 자네의 그 섬세한 손길이라면 딱 맞는 선을 건드릴 수 있을 거라고 믿네." 3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