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이끄는 곳으로
백희성 지음북로망스
( 출판일 : 2024-08-21 )
작성자 :
이○묵
작성일 : 2025-05-02
페이지수 : 360
상태 : 승인
인스타에 요즘 그림삽화로 이쁘게 포장한 책 광고에 홀려서 빌려 보았다. 이 책은 건축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책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며, 가족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프랑스에서 현업 건축가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파리의 건축법이 보수적이어서 뭐 하나 개축하는데도 관공서의 승인을 얻고 문화재에 준해서 관리하는 전통에 뭔가 느낀바가 있어서, 동네를 다니며 뭔가 사연있거나 특별한 건물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그 집의 우체통에 인터뷰를 할 수 있겠느냐고 하여 사연을 모았다고 한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겠냐면서.
그런 이야기들을 긁어모아 한편의 씨줄과 날줄이 있는 이야기로 탄생시켰다. 나는 건축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건축 좋아하는 누군가와 동행하며 그분의 건축에 대한 조예를 자주 들어왔었다. 그분의 건축 철학은 영화 브루탈리스트에서 나올 법한 건축에 담긴 이상, 혹은 종교적 이상향, 아니면 교리, 그리고 대중들에게 전하는 메세지 등에 치중되어 있었는데, 막상 그런 건물들에서 하루 이틀 생활해 보면 분명 대단한 가치관을 품고 있다는 것까지는 자부할 만 한데, 사람이 그 안에서 사는데는 다소 불편함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제주도에 추사 김정희 유배지 옆 기념관의 경우는 승효상이 지었다. 그 기념관은 지하에서부터 관람을 시작하기 때문에 지하로 내려가게 마련인데, 그의 구비구비 절망스러운 유배길을 상징하려 인지, 그의 인간 심성 깊은 곳에 대한 탐구를 상징하려인지 계단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빗면의 판판한 돌이 있었다. 그 경사는 장애인 휠체어를 놓기에도 좁고, 사람이 타고 내려가기에도 다소 무리가 있다. 분명 건축에 의미를 담기는 담았는데, 실용성으로서는 뭔가 의도적인 불편함을 느꼈던 것이다.
백희성이 언급한 이야기 속 파리의 집은 절절한 사연들이 녹아있고(이것을 다 풀어버리면 스포일러가 된다.) 특정한 일시에만 나타나는 장치들이 있으며, 그런 장치를 보기 위해서는 일년의 딱 어느 순간에만을 일기 일회로(해마다 기회는 있지만)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사연들과 단초들을 모아 역분석하여 알아낸 것들은 그 곳에 주인이 바뀌어 가더라도 그 사람들의 손때가 묻고, 그사람들의 편의에 다가서는 따뜻함이 녹아 있는 건축들이었다. 그런 사연을 탐정처럼 명백히 드러내 놓는 것만으로도 출생의 비밀과 엉킨 관계가 풀리고, 미워했던 사람에게 쌓였던 오해를 풀고 인생의 관조에 깊이가 생기는 선순환이 이루어졌다.
건축가 출신이라 문체가 좀 무미건조하고 영화가 노벨라이징 된 소설같이 원숙한 맛이 떨어지는 바는 있지만, 집필의 기본 아이디어는 퍽이나 마음에 들었고, 내가 선호하는 건축의 가치관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책이지 싶었다. 읽다 보면 으이구 뻔해 싶은 장치들을 복선으로 깔아두고, 그것을 건축으로 재현해내는 것을 미리 추리해 볼 수 있는 재미도 선사한다. 주로 태양광의 이동과, 향기, 마루의 소리나 난간의 높이와 촉각 보조선 같은 장치들이 그러했다. 주인공이 집을 받을 수 있다는 미끼를 무는 소설적 설정은 신의 물방울의 서두를 좀 차용한 것 같은 식상함은 있었다.
그래도 먼지 그득한 곳에서 숨겨진 비밀을 끄집어 올리는 장치는 러브레터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독서카드를 찾아내는 것 같은 느낌도 들어서 좋았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