梧倉誌
梧倉誌編纂委員會梧倉誌編纂委員會
( 출판일 : 1998-01-01 )
작성자 :
이○묵
작성일 : 2025-04-27
페이지수 : 706
상태 : 승인
제주도 여행을 가서 조천읍의 도서관에 들어가 향토 서적을 뒤적거린 일이 있다. 제주 4.3에 관련된 내용이나 민속사나 신화 같은 책들이 있었다. 여행을 마치고 오니 벌써 전입온지도 8년이 넘어가는 이 동네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사서에게 물어보세요 서비스를 사용하여 청주 지역의 향토 자료에 대해서 여쭈었던 적이 있다. 질문이 시원찮아서 그랬는지 별로 눈에 띄는, 찾아보고 싶은 책은 없었는데, 도서관 일을 보다가 문득 오창도서관 향토서가에 있던 이 책의 책등이 눈에 띄어서 집어 보았다.
관심은 없었다 하더라도 업무상 공영.마을버스, 콜버스 등을 타고 이동네 저동네를 쏘다니다 보니, 내가 생각보다 오창의 동네에 대해서는 외지 사람 치고 훤하게 아는 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책이었다. 그런데 그런 동네의 출생의 비밀? 을 알게 되는 것 같은 재미가 있는 책이었다.
일단 책의 편찬 동기는 오창과학단지의 출범에 따른 동네 원주민의 이주 문제에 따라서, 동네의 사적과 문화 등을 보존코자 위원회를 결성하여 벌써 30년쯤도 전에 시작하여 98년에 출간을 했던 듯 싶다. 책 표지를 넘기자마자 나오는 구 오창의 (원오창으로 불리기를 바라는가본데...) 옛 모습 조감도가 있었다. 그때 당시에는 지하도도 없고, 도시화도 안 되었으며, 교회있는 자리즈음엔 숲도 있었다. 17번 국도로 올라가는 자리도 차선이 좁아보이고..
오근창의 유래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는데, 농지가 넓다보니 곡물창을 열면서 지네신 한마리를 죽였다가, 동네 처녀를 비싸게 사서 제물로 바치는 악습이 생겼다고 한다. 그 중 어느 복있는 처자가 두꺼비를 열심히 잘 멕인 복으로 쌍으로 다니는 다른 지네를 두꺼비가 해치워 주어 동네에 평화가 찾아오고 처자는 목숨을 부지했다는 일화가 눈에 들어왔다. 조선 중기인지 후기인지 이런 설화가 있었다면 딱히 신화가 만들어질 시대도 아니긴 하지만 시사하는 바는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단지의 조성에 따라 지금의 오창은 2차전지 클러스터를 주로 하는 190여개 기업체의 집성촌이 되어 있다. 그런 와중에 파괴한 환경이나, 원주민들의 이탈이나, 그외 헤아리지 못할 화가 누적될만한 여지는 없었을까? 방사광 가속기도 들어선다고 하는데, 그거는 탈 없도록 잘 짓기를 바란다. 스위스 CERN 이 문제가 생겼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지만, 한국제 과학산업기술 육성이 윤석열 정부에서 예산이 빠져서 뭔가 덜떨어진 것이 나온다면, 처자 한둘 바쳐서 회복될 문제는 아닐 거라고 본다.
청원군이었다는 얘기는 들어서도 알고, 오송역에서 늘상 택시 시계외 요금으로 덤태기 쓰면서 옥산 거쳐 돌아오며(어제도 고작 20키로 남짓에 35000원 떼였다.) 모르지 않는데, 오창 읍도 아니라 오창면이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질푼이가 초정리 약수마냥 조그마한 우물이었다는 것도, 동네마다 예쁘고 크고 우람한 나무가 하나씩 목신으로 있어왔다는 점(저번에 구룡리가서 이사온 지 7년만에서야 봤던 보호수 등걸도 여기서 다뤄진 듯 하다.
양청리는 시재 라고 불리는 동네도 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재주있는 사람도 많이 모여 살고 안동김씨의 집성촌이었다는 듯 하다. 목령산 정기를 받아서 그런가... 양청고의 학생들이여 한국에 큰 보탬이 되는 사람들이 되길 빌어본다.
동네의 이모저모를 알게 된 것으로 이 책의 가치는 역할을 다한 것 같긴 하다. 뒤에 뭔 새마을 이장명단 호주명단 등등 동네 명사 등등의 명부는 굳이 넣을 필요가 있었나...(육군대령, 세무사 등등까지 저명인사로 등재되어 있다.) 하는 좀 근시안적인 기획이고, 여러 사람에게 두루 읽히길 바랬다면 국한문 병기라도 하던지 싶었는데, 간혹 단어의 어간이 한문으로만 쓰여서 불편했던 점도 있었다. 하긴 옛 어르신들이 그 정도로 앞을 내다보실 분들이면 뭐가 달라도 다르겠지 하는 생각은 든다... 구오창을 원오창으로 불려지길 바라는 심사도, 동네 송대공원이나 오창호수공원에 왠만한 대왕비보다 큰 돌을 갖다가 겸손하지 않게 동네 유래에 대해 소상히 써둔 비도 보면 이 동네 원주민들은 자기 고향에 대한 대단한 애향심이 있었구나 하는 부분은 알겠으나, 아무래도 타자의 시선으로 보기엔 자의식 과잉이다..라는 생각을 지울수는 없었다. 겸손해야 눈에 띄는 것은 지고의 사실이나, 나부터도 이 글에 만심이 그득한데 하긴 누굴 탓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