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영자 할머니는 괴산에 시집오던 날,“앞에도 산 뒤에도 산/ 산만 보여/ 도망도 못 가네”라고 한숨짓는다. 진달래반 정희 할머니는 “엄마 산소에 있는 열매를 먹으면/ 젖맛이 났다”고 회상한다. 한때 이팔청춘이었던 할머니들은 이제 괴산두레학교에서 벗들과 함께 글을 배우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며 “내 인생 내가 산다”(윤명희)는 인생의 기쁨을 노래한다. … 나는 이 시화집을 나이 듦의 향기를 뜻하는 ‘향노香老의 자화상’이라고 부르고 싶다. - 고영직 | 문학평론가 괴산 할머니들, 글로 배운 적 없는 삶을 처음 쓰고 그리다 『얘들아 걱정 마라, 내 인생 내가 산다』는 괴산두레학교에서 뒤늦게 글을 배운 어르신들이 2014년부터 10년 동안 쓰고 그린 시화를 골라 엮은 책이다. 60대 후반에서 90세가 넘은 일흔아홉 분의 할머니들, 네 분의 할아버지들이 쓰고 그린 121편의 시화가 담겨 있다. 이들 중 드물게 다른 시기에 잠시 글을 배운 적이 있는 분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 괴산두레학교에서 처음 글을 배운 분들이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것도 내 탓, 글 모르는 것도 내 탓이라 평생을 눈치 보고 기죽고 살아왔다는 분, 남부끄러우니 글 배우러 다니는 걸 말하지 말라던 분…. 할머니들에게는 글을 배우는 데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조금씩 글자를 익히고 글을 쓰게 되었다. 다음은 19세에 시집와서 평생 농사일을 해온 78세의 안대순 할머니가 쓴 글이다. ㄱ ㄴ ㄷ ㅏ ㅑ ㅓ ㅕ 처음 보는 글자 가 갸 거 겨 가지 고구마 글자 겨우 아니 하하 호호 로 료 브 비 글자가 비료지 어렵고 힘든 시대를 견디며 평생을 살아온 할머니들이 가슴속에 담아둔 노래, 털어놓아 본 적 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데는 또 얼마나 큰 용기와 결심이 필요했을까. 곪기도 하고 삭기도 했을 이야기가 잘 발효되기까지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이 책에는 ‘글로는 배운 적 없는 인생이 글로 표현되었을 때’의 가슴 뭉클함이 있다. 꾹꾹 눌러쓴 글자, 그림을 따라 그리듯 조심스럽게 쓴 글자, 비뚤비뚤 알아보기 어려운 글자 등 성격에 따라 서로 다른 글씨체들, 그리고 그 모퉁이에 무심한 듯 그려 넣은 그림 한 쪽마다에는 우리 인생의 희로애락이 있는 그대로 담겨 있다. 아빠 닮아서 키가 훤칠한 딸/ 얼굴도 갸름하고 이목구비 뚜렷하고/ 이쁜 딸// 아침저녁으로 전화해서/ 엄마 뭐 잡쉈어/ 맛있겠네, 맛있게 잡숴 하던 딸// 올 사월에 간암으로 먼저 간 딸/ 꿈에라도 보여주면 좋겠는데/ 꿈에도 안 보이네// 엄마는 그리워서 밤을 새운다/ 그립고 그리워서 저 개울 방천에 가서/ 소리만 야호야호 지르고 만다 -김복환(89세), 〈딸아〉 내 시절 얘기하면 두꺼운 책 한 권/ 삼남매 껴안고 세상과 맞섰어/ 오직 돈을 벌어 아이들 뒷바라지하고/ 남들, 아니 나를 버린 신랑/ 웬수 보라고 가장 멋지고/ 좋은 곳에서 결혼식을 했어 -방붕이(80세), 〈자녀들 결혼날〉 세월을 못 타서 고생을 한 거지/ 험한 세월에 나서 고생을 한거지/ 다 해내고 나니 지금은 만사 오케이/ 지금은 사는 맛이 나지 -김정순(90세), 〈만사 오케이〉 재미있게 살면 사랑이지, 내 인생 내가 산다 이 책에는 할머니들 시대에 겪었을 어린 시절의 지독한 가난, 끝이 없는 농사일의 고단함, 먼저 자식을 떠나보낸 한恨 같은 아픔과 슬픔도 많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웃게 만드는 질긴 삶의 의지 또한 함께 어우러져 있다. 억지로 결혼했는데 좋은 남편을 만나기도 하고, 그렇게 속을 썩이던 자식이 효자가 되고, 끝이 보이지 않던 고생이 끝나고 나니 그 또한 좋은 추억으로 남기도 한다. 그것은 새로운 용기가 된다. 올해 내 나이 팔십육/ 얼굴엔 주름이 가득/ 허나 몸과 마음은 아직도 청춘이다 … 난 아직도… 낫 들고 콩, 들깨, 참깨 등등/ 모조리 싹둑싹둑 베는 현역 농사꾼이다 -정을윤(86세), 〈나는 아직도 현역이다〉 얘들아 걱정 마라/ 잔소리 하지 마라/ 내 걱정 하지 마라/ 엄마는 하고 싶다/ 이제는 하고 싶다/ 내 인생 내가 산다/ 사는 데까지 살다 갈란다 -윤명희(84세), 〈 내 인생 내가 산다〉 이 책에 실린 할머니들의 꾸밈없는 글과 그림에는 향기가 배어 있다. 살 냄새, 흙냄새, 땀 냄새, 풀 냄새, 바람 냄새 같은 향기다. 할머니들은 시가 무언지 몰라도 시인이 되었다. ‘글자’를 배우고 쓴 ‘글’들이 ‘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작가 소개글에 함께 있는 인물화는 할머니들이 직접 그린 자화상이다.